해의 온도가 낮아질 무렵, 듬성듬성 나 있는 나무덕에 아래쪽 지대보다 햇살을 많이 받고 있는 동굴 앞, 화려하게 수 놓인 연분홍 꽃신이 발을 디뎠다. 고동색 머리를 땋아 자줏빛 댕기로 멋을 내고, 흰저고리에 풍성한 청록 치마를 한손으로 끌어안았다. 다른 손으론 앙상한 나뭇가지에 핀 봉오리를 만져보았다. 제각각 모양이 다른 가락지들이 낙월의 손을 치장하고 있었다. 한 손가락에 적게는 한 개, 많게는 두 개가 있는 가락지들이 도합 여덟은 되었다. 산 아래서 낙월의 정수리가 보일때부터 백호는 동굴 앞쪽에 나와 엎드려 있었다. 동굴 앞 일광을 즐기고 있었던 것 마냥 여유를 부리듯 꼬리를 살랑였다. 가뜩이나 치마 때문에 걸음이 느린 낙월이 풍월까지 감상하며 오니 더욱 애가탔다. 이내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켜 감상..
고요한 산 속의 적막을 시도 때도 없이 깨는 가을. 버석한 낙엽에서 백호 한마리가 사냥꾼의 모습을 한 사내를 제 무게로 포박하고 있다. 사내를 향해 뱉는 백호의 호흡에 흔들리는 얇은 수염이 제 눈에 찔릴까 우려가 됐는지, 사내가 눈 한쪽을 질끈 감고 팔다리를 휘적거리는 모습이 하찮다. 팔을 뻗어도 하얀 짐승의 어깨에도 닿지 않았다. 좀 전까지만해도 제보다 만만한 사슴에 화살을 박았던 사내였었다. 사냥감 옆에 나란히 누워 있는 것이 속상해, 짐승때문에 거동을 할 수 없는 것이 서러워 코 끝이 찡했다. "첨으루 활을 잡아본 것인디....나꺼정 사냥 당헐줄은.....아니, 근데....이런 호렁이가 어찌 이써어..." 백호가 날이 선 이를 보이자 사내는 다른 쪽 눈까지 감아버렸다. 백호는 이제야 고개를 돌려 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