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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낙월*백호

호랑이굴의 여우 #1

Miho_낙월 2021. 1. 10. 21:23


고요한 산 속의 적막을 시도 때도 없이 깨는 가을.  

버석한 낙엽에서 백호 한마리가 사냥꾼의 모습을 한 사내를 제 무게로 포박하고 있다.  사내를 향해 뱉는 백호의 호흡에 흔들리는 얇은 수염이 제 눈에 찔릴까 우려가 됐는지, 사내가 눈 한쪽을 질끈 감고 팔다리를 휘적거리는 모습이 하찮다.  팔을 뻗어도 하얀 짐승의 어깨에도 닿지 않았다.  좀 전까지만해도 제보다 만만한 사슴에 화살을 박았던 사내였었다.  사냥감 옆에 나란히 누워 있는 것이 속상해, 짐승때문에 거동을 할 수 없는 것이 서러워 코 끝이 찡했다.  


"첨으루 활을 잡아본 것인디....

나꺼정 사냥 당헐줄은.....

아니, 근데....

이런 호렁이가 어찌 이써어..."


백호가 날이 선 이를 보이자 사내는 다른 쪽 눈까지 감아버렸다.  

백호는 이제야 고개를 돌려 엉덩이와 허벅지 위쪽에 화살이 박혀있는 사슴을 보았다.  성한 나머지 다리와 목으로 최대한 지면을 밀어냈으나 발걸음을 하기 위해 앞발을 듦과 동시에 낙옆에 파묻히고 말았다.  백호는 떨어진 화살통 안에 있는 화살들을 제 꼬리로 빼서 힘을 주어 부러뜨렸다.  일어서는 것을 포기한 채 사슴은 부러지는 화살들을 보며 제 불행을 위안삼았다.  

소리만으로도 제것이 파손된 것을 느낀 사내는 눈을 떠, 화살의 최후를 보았다.  황급히 활을 찾아 시선을 옮기는데, 백호가 사내의 몸 위에서 내려갔다.  가벼워진 몸의 감각이 어색하여 활을 찾는 시선만 활발히 움직였다.  백호의 이빨에 갇힌 활을 보고 사내는 다급히 말을 했다.


"아...아녀어..

화살 부쉈응께....활도 같이 부수라고.....

...그러려고 찾고있었던거여...허허..."


회색 눈은 아무런 미동도 없이 사내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사내는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몸은 백호를 향한채로, 눈으로는 흘긋 뒤를 보며 뒷걸음쳤다.  백호가 고개를 돌려 입에 문 활을 산 아래로 뱉어버리자 사내는 이때다싶어 뒤돌아 허겁지겁 내려갔다.  

백호가 몸을 돌려 사슴을 보자 헐떡거릴 힘도 없이 생이 잦아지는 사슴이 천천히 눈을 두어번 껌뻑였다.  그것이 최대한의 감사였다.  이에 백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명하는 낮은 소리로 말을 걸었다.   


"고생이 많았네.

원망스러워도 어쩌겠나


활은 더 이상 잡지 않을걸세

겁이 많아"


도망가던 사내의 모습이 잠시 떠올라 콧김을 뱉었다.  백호는 사슴에게 다가가 환부에 바짝 입을 대어 박혀있는 화살대를 꽉 물었다.  사슴은 고개를 팍 숙여 숨을 가다듬었다.  백호는 환부 옆쪽에 발을 대어 세게 누른뒤 화살을 한번에 뽑았다.  사슴의 몸통을 누르고 있던 발로 솟구쳐 나오는 피를 막았다.  한번 더 힘을 주어 환부를 세게 누르자 사슴은 바삭한 낙엽에 제 눈을 비벼 적셨다.  경련이 일던 사슴의 엉덩이가 떨림을 멈추자 백호는 지압하던 발을 떼었다.  자국은 남았지만 더 이상 흘러나오는 피는 없었다.

사슴은 감각이 생긴 다리를 느끼며 굽어져 있던 무릎을 디뎌보았다.  이어 다른 다리들도 힘을 받아 똑바로 서게 되었다.  사슴은 촉촉한 눈망울로 백호를 한번 더 쳐다보곤 산 안쪽으로 사라져갔다.  

백호는 끈적한 발바닥에 엉겨붙은 낙엽과 실랑이하다 멈췄다.  짧은 정적도 잠시, 또다른 인기척을 따라 눈동자가 반응했다.  수풀 사이로 쫑긋한 연갈색의 삼각귀가 보였다.  귀는 끝내 숨기지 못하고 삼각귀는 빠르게 산을 올랐다.  누가봐도 백호의 모양새가 사냥을 막 마친 짐승의 모습이니, 위협적인 존재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선인 듯 싶었다.  


        

몸통 굵은 나무들을 지나 앙상하게 어린 나무가 듬성듬성있는 지대에, 동굴 중에서는 조금 작은 편에 속하는 동굴이 있었다.  입구 앞에 내리쬐는 햇살을 받으며, 하얀 털 덕분에 더 선명해 보이는 검은 줄무늬를 자랑하며 백호는 적신 털을 말리고 있었다.  약간의 바람에 털이 흔들리자 엎드리고 있던 몸을 일으켜 동굴 안으로 향했다.  좁은 입구와는 달리 곡선을 이루며 깊게 파여있는 굴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갔다.  덩치 좋은 사내가 온다면 허리를 굽혀야 할 정도로 폭에 비해 낮은 높이였다.  혹여라도 쉴 곳을 찾아 오는 인간은 이 불편함에 다른 곳을 찾을 것이기에 백호가 방해받지 않을 수 있는 곳이었다.  내부는 백호의 진한 채취가  배어 있기에 짐승들도 입구 앞에서부터 위협을 느끼고 발을 돌려가는 곳이었다.

그러나 항상 예외는 있었다.  성난 상반신에 비해 하반신은 차마 바닥에서 떼지도 못하고 백호의 소리를 듣느라 잔뜩 긴장한 삼각귀의 여우.  몽실한 두개의 꼬리도 한껏 부풀려 용기가 있음을 보이려 애쓰는 모습으로 그와 대면했다.  꼬리 중 하나는 이음새가 떨어질 정도로 상처 자국으로 너덜너덜 했다.  백호는 몸을 낮춰 여우를 응시했다.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맞춰 여우의 노란눈동자가 빛났다.  백호를 제외한 그 무엇도 오지 못하는 곳에 요괴가 와 있다니, 대단한 용기였다.  그 마음을 높게 사, 여우의 반응을 기다리기로 했다.  힘을 주어 닫고 있던 긴 입이 열렸다.


"여기서 살 것이다!"


떨렸지만 단호한, 긴장한 탓에 끝음이 찢긴 소리를 쏘았다.  백호는 있는 자리에서 다리를 굽혀 엎드렸다.  그리곤 꼬리를 움직여 머리 위로 털이 삐쭉 서 있는 여우의 털을 꾹 눌러 여우를 앉혔다.  그의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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